- 급경사 돌계단을 숨을 헐떡이며 느린 걸음으로 올라서니 아름드리 소나무 사이로 로체와 에베레스트 정상이 멀리 조그맣게 고개를 치켜든다. 처음 마주친 에베레스트 정상이지만 지구상의 제일봉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는다. 수많은 다국적 사람들이 운집해 각국의 언어들로 처음 마주친 로체와 에베레스트를 보며 감탄사를 터트린다. 오른편으로는 아래서 올려다보았던 탐세르쿠의 위용이 이제는 손을 뻗으면 닿을 것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길 옆 언덕배기에는 우리나라 산천에 가을이면 피어나는 용담꽃을 닮은 보랏빛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 있어 이곳도 가을임을 느끼게 한다.
입산 신고처를 지나 남체바자르에 도착했다. 3,440m인 고산에 이렇게 크고 풍요로운 도시가 있다는 것이 믿기 힘들 정도다. 셰르파족이 오래 전에 터를 잡은 남체바자르는 매주 토요일이면 티베트와 인도에서 물건을 해온 상인들이 장을 여는 곳으로 더욱 유명하다.
남체에서 1박하고 다음날 아침에 산길로 접어드니 무서리가 잔뜩 내렸다. 지금은 겨울이 되어도 남체까지만 눈이 내린다고 한다. ‘옴마니반메훔’이 빼곡하게 양각된 거대한 바위를 돌아 철조망 문을 통과한 수많은 인파가 등산로를 따라 오른다. 외국 여인 몇 사람은 벌써부터 고소증세로 구역질을 하는 것이 눈에 띈다. 조금 오르니 남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며 건너편 콩데와 우뚝한 탐세르쿠가 가슴 후련하게 펼쳐진다.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트레커들로 우리의 가을날 북한산만큼이나 북적댄다.
- ▲ 캉주마에서 바라본 아마다블람.
- 남체 뒷산 콤빌락 석산의 웅장함이 눈 쌓인 설산과 어우러져 멋스러움을 더한다. 콤빌락은 셰르파들이 1년에 2시간 이상 기도하는 곳으로 신성시하는 산이다.
능선을 올라서니 아마다블람과 탐세르쿠, 로체와 에베레스트가 한눈에 시선을 집중시킨다. 육산을 느끼게 하는 능선과 묵산(墨山)처럼 보이는 석산(石山)과 하얗고 첨예한 설봉들이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솟아올라 장관을 연출한다. 스케치를 시작하기도 어렵고, 쉽사리 끝맺을 수도 없다. 아예 두루마리에 작품을 그려야 할 모양이다.
그림 같은 풍광을 감상하며 산책하듯 여유롭게 올라서니 에베레스트 뷰 호텔이다. 조망 좋은 곳에 위치한 이 호텔은 에베레스트, 로체, 아마다블람, 탐세르쿠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야외 조망처를 갖추고 있어 여행객들이 필히 찾는 곳이다. 조망 좋은 곳에서 밀크커피(야크우유+커피) 한 잔을 마시며 에베레스트를 바라보니 세속의 묵은 때가 한순간에 씻겨 내려간다. 산과 산의 계곡을 따라 중간에 거칠 것 하나 없는 3,880m(뷰호텔)에서 8,000m가 넘는 봉우리를 한순간에 바라볼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장쾌한 노릇인가. 로체 정상에는 하얀 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어 마치 화산이 분출하는 듯하다.
서양화 기법과 한국화 기법의 접목이 가능할까
일행은 휴식을 마치고 쿰중으로 내려섰다. 쿰중마을로 내려서는 길목엔 키가 낮은 잡목과 동백을 닮은 잡목이 어우러졌다. 쿰중은 셰르파족들이 티베트에서 히말라야산맥을 넘어와 제일 먼저 자리 잡은 곳으로 셰르파들에게는 고향 같은 곳이다.
- ▲ 추쿵에서 바라본 설산의 첨봉들.
- 쿰중에는 세계 각국에서 지원을 받는 힐러리 학교도 있다. 이 학교는 에베레스트를 초등한 힐러리경을 기념하여 세운 학교다. 힐러리경은 1953년 5월 29일 셰르파 텐징 노르게이와 함께 에베레스트를 초등한 사람이다.
나는 쿰중에서 오리지널 야크를 처음 만났다. 지금까지 보았던 야크소는 야크와 소의 교잡종으로 ‘촙교’라고 하며 고지대와 저지대를 오갈 수 있지만 순수 야크는 3,500m 이하로는 산소가 너무 많아 내려갈 수 없다고 한다. 촙교와 야크는 뿔의 생김새로 구별한다.
널따란 분지에 형성된 쿰중마을은 골목길과 텃밭 곳곳에 돌담으로 둘러쌓여 있어 우리나라 청산도를 느끼게 한다. 청산도 또한 층층으로 된 구들장 다랑논과 돌담으로 유명하며, 느림의 도시 슬로 시티로 지정된 곳이다. 이곳 또한 현지의 어린아이들 말고는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처음 와서는 고소 때문에 뛰어 다닐 수 없으니 느림의 도시며, 계단식 밭이 많다. 양철지붕과 슬레이트 지붕도 청산도를 빼닮았다. 돌담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이불 빨래들이 인상적이다.
점심 식사 후 지금까지 함께했던 ‘블랙야크 에베레스트 트레킹팀’과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나누고 로체로 오르기 위해 셰르파와 포터 한 명을 데리고 캉주마로 향했다. 캉주마에 도착해 곧바로 야크장에서 북면의 탐세르쿠를 스케치하는데 산 그림자가 줄달음을 친다. 그늘진 곳과 양지 쪽의 온도차는 매우 심하다. 스케치를 마치니 햇살은 순식간에 산 너머로 숨어버리고 온 세상이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순식간이다.
숙소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마치니 다시 하얀 설산들이 눈앞에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다. 오후가 되면 이런 기후가 반복한다고 한다.
다음날, 풍기텡가까지 급경사 산길을 내려선다. 경사가 심해 몸에 중심을 잡기도 힘든 길을 짐을 가득 실은 야크 행렬이 지난다. 풍기텡가에서 협곡의 출렁다리를 건너 급경사를 올라야 한다.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며 반 발자국씩 옮겨 놓는다.
- ▲ 딩보체마을과 아마다블람 북벽.
- 조금 오르다 휴식을 취하며 건너편의 아침을 바라본다. 붉은 햇살은 산 주름의 음양을 더욱 뚜렷하게 하며 그 아름다움은 중첩한 심산유곡의 극치를 연출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대부분 서양화적인 분위기라고 하지만 한동안 그 비경을 바라보고 있던 나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그 무엇이 스치고 지난다. 지금의 이러한 풍경을 선과 면으로 표현하는 서양화기법과 음양의 조화로 획을 중시하는 한국화를 접목해 표현한다면 자연보다 더 아름다운 진경산수화 한 폭을 그릴 수도 있겠다는 영감을 얻는다.
발아래 검푸른 녹색에서 감청 군청으로 이어진 색깔들은 산릉을 타고 오르다 마침내는 하얀 설산으로 변해 하늘을 찌르며 우뚝 선다. 길옆 바위 틈새에는 유난히 붉은 단풍잎이 아침 햇살에 더욱 곱게 물든다. 수목한계선이 비탈진 산허리를 감고 돌아 계곡을 가로질러 옆 산을 타고 기어오른다.
지나온 산길을 뒤돌아본다. 멀리 콩데의 설산, 우뚝 솟은 탐세르쿠의 웅장한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지난밤 하룻밤을 묵었던 캉주마가 산비탈에 작은 성냥갑처럼 아련하다. 인생도 그렇듯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면 그저 아름다움으로 느껴진다.
곰파(사원)가 있는 탕보체에 올랐다. 아마다블람, 로체, 에베레스트가 더욱 가까이 다가선, 조망 좋은 곳이다. 불심이 깊은 사람은 곰파에 올라 묵상기도라도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로움도 있다. 힘들게 이곳 탕보체에 올라온 보람을 느끼기에 충분하며 히말라야 사계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오래된 고탑과 오색 깃발이 아마다블람과 어우러져 파란 하늘에 우뚝하니, 무언의 설법을 가슴으로 듣는다. 겹겹으로 불탑이 세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범상치 않은 불법의 땅임을 말해 주는 듯했다. 계단을 힘겹게 오르니 사찰문이 나타나고, 그곳을 통과하니 엄홍길 휴먼스쿨로 오르는 갈림길 이정표가 나타난다. 4,000m가 넘는 산간오지에 학교를 세워 봉사한다는 것은 참으로 산꾼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 ▲ 로체의 황금노을.
- 너무 순간적이라 꿈꾼 듯한 설산 황홀경
네팔은 라나 시대가 종식된 1950년대 초에는 인구의 10%만이 글을 읽고 쓸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교육환경이 아주 열악하다. 학교는 좁고 답답하며 조명도 어둡다. 한 학급에 40~50명이 몰려 있는 데다, 교실이 없어서 잔디밭에서 공부하는 경우도 있다. 교육은 나라의 미래다. 네팔은 잘못된 교육제도가 지금의 현실을 불러 왔는지 모른다.
엄홍길 휴먼스쿨 이정표를 지나 다시 산길을 걷는다. 중앙분리대 같은 석탑들을 지나 발아래 펼쳐진 그림 같은 야크목장을 바라보며 걷는다. 목장 옆으로 흐르는 강물은 햐얀 포말을 일으키며 산과 산의 경계를 표시한다.
아마다블람이 굽어보는 팡보체 마을은 유난히 부유해 보인다. 첨봉으로 둘러싸인 곳에 아늑한 마을이 참으로 평온하다. 해발 4,010m에 위치해 있다. 일반인들은 고소증으로 시달릴 수 있는 이곳에서 이들은 일상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팡보체에서 점심을 먹는데 파리 몇 마리가 공중비행을 한다. 아마 이곳 파리들은 고소증도 없는 강심장들인가보다.
소마레를 지나니 키가 낮은 잡목도 없다. 중간 중간 거대한 바위들과 드넓은 초원이 어우러져 마치 서부영화의 세트장처럼 느껴진다. 건너편 산등성이에 하얀 야생마 두 마리가 서 있어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이곳부터는 지금까지 걸어왔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이래서 큰 산에서는 여러 계절을 한꺼번에 느끼게 되는가보다. 민둥산 너머로는 설산이 우뚝하고, 흐르는 강 건너편으로는 낮고 검은 산이 탄광촌을 연상케 한다.
협곡으로 내려섰다가 마지막으로 머물 마을인 딩보체로 오르는 길이 한눈에 훤히 바라보인다. 야크 목장을 지나니 하늘에 온통 까마귀 떼가 고공비행을 하며 장관을 이룬다. 이곳 까마귀는 산 아래서 보았던 까마귀보다는 체구가 작고 부리와 발은 붉은색이다.
- ▲ 수묵으로 바라본 다위체와 촐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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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철다리를 건너 고행의 오르막길을 오른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산소량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이 가슴으로 느껴진다. 가도 가도 끝없고 보상도 없는 힘들고 험한 길을 무엇 때문에 이렇게 죽음과 동행하며 오르고 있느냐고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만약 한 발 실수라도 있다면 불귀의 객이 될 수도 있는데 말이다. 두타고행을 하듯 힘이 들수록 내면의 세계는 많은 문답으로 가슴속 깊이 빠져든다.
멀리 산허리에 마을 하나가 나타난다. 산길은 점점 풀 한 포기 없는 삭막한 길로 변해간다. 산모퉁이를 돌아서니 딩보체(4,410m)가 한눈에 가까이 내려다보인다. 로체의 가까운 모습을 보기 위한 마지막 마을이다. 가슴속에서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이곳에서 고소 적응을 한 다음 추쿵(4,730m)까지 올라 로체를 스케치하면 된다.
딩보체 숙소에 짐을 풀고 하늘을 보니 너무 맑다. 옷을 두툼하게 껴입고 로체에 비치는 황금노을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카메라를 들고 기다렸다. 산 그림자는 벌써 숙소지붕을 지나 건너편 산 능선을 타고 빠르게 기어오른다. 순간이다. 로체가 황금색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정말 영화 ‘인디아나존스’에서나 볼법한 환상의 순간이다. 정신없이 셔터를 눌러댄다. 조금 있으니 다시 하얀 설산으로 변해 버린다. 너무 순간적이라 꿈을 꾸는 듯했다.
- 다음날 로체의 진경을 가까이서 바라보기 위해 추쿵을 오르며 아마다블람과 촐라체를 스케치하는데 한가로이 마른 잔디를 뜯던 야크 두 마리가 이쪽을 우두커니 바라본다. 추쿵을 둘러싼 설산의 첨봉들이 마치 경쟁하듯 솟아 있다. 한가롭게 스케치를 마치고 딩보체에 도착해 저녁에 황금노을을 또다시 바라보며 환희에 빠졌다. 다음날 언제 다시 찾게 될지 모르는 로체와 딩보체를 뒤로하고 세계의 어머니라는 지구의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스케치하기 위해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 두글라(4,620m)로 향했다. <계속>
곽원주 화백 약력
순천대학교 졸업. 개인전 10회(조선일보미술관 3회, 중국 섬서미술관 외), 단체전 150회 이상(한중문화교류3인전, 국립현대미술관 외), 월간산 7년 연재(백두대간 및 중국산기행 외), KBS1TV 학자의 고향 45회 방송그림 연재. 대한민국미술전람회, 동아미술대전, 신미술대전 등 심사위원 역임. 저서 <백두대간을 화폭에 담아>. cafe.daum.net/ksejung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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