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지식

[해외 트레킹] 존 뮤어 트레일 358km (상)

빌레이 2012. 1. 13. 15:21

[해외 트레킹] 존 뮤어 트레일 358km (상)
갈 길이 아무리 길고 길어도 아무도 숏컷을 만들지 않는 이유
투올러미 메도 ~ 에블린 레이크 갈림길목 10.6km

국내에도 존 뮤어 트레일(John Muir Trail·JMT)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지고 있다. 이미 영상으로도 소개된 바 있는 존 뮤어 트레일은 358km에 이르는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이다. 해외의 많은 백패커들도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꼽으라면 존 뮤어 트레일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길인 것이다.

존 뮤어 트레일은 북쪽 요세미티계곡의 해피 아일(Happy Isles)에서 남쪽의 휘트니산(Mt. Whitney)까지 이어진 단 하나의 길이다. 358km에 이르는 이 길은 요세미티국립공원과 인요국립공원(Inyo National Forest), 킹스캐년국립공원(Kings Canyon National Park), 시에라국립공원(Sierra National Forest), 세콰이어국립공원(Sequoia National Park) 등 하이 시에라(High Sierra) 지역의 대표적인 국립공원을 관통하며 이어진다. 해발 3,000m와 4,000m 고도에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진 트레일은 유리알처럼 빛나는 호수와 호수 사이로 연결되며, 울창한 침엽수림과 숲속으로 흐르는 개울은 인간 세상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풍광을 보여준다.


▲ 길고도 외로운 길을 백패커 한 명이 묵묵히 걸어가고 있다.

존 뮤어 트레일은 태고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20일 정도의 장기 일정을 스스로 해결하고 가야 하기 때문에 그 가치는 더욱 빛난다. 더욱이 이 길은 1년을 통틀어 불과 수백 명만이 종주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어 접근 자체가 대단히 어려운 곳이다.

천상의 초원, 투올러미 메도

8월 13일 투올러미 메도에서 출발하는 존 뮤어 트레일 종주 퍼밋을 받았기 때문에 요세미티에서 타이오가 도로(Tioga Road)를 거쳐 투올러미(Tuolumne)로 향했다. 타이오가 도로는 요세미티 인근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이다. 요세미티국립공원을 동서로 관통하는 도로로서 해발 3,000m가 넘는 고도에서 내려다보는 드넓은 초원과 만년설을 안고 있는 거대한 시에라산맥, 바다처럼 넓은 호수 등은 인간 세상의 풍경이 아니었다.

투올러미 메도(Tuolumne Meadow) 가는 길에 테나야 레이크(Tenaya Lake)라는 아름다운 호수를 만나게 된다. 해발 2,484m(8,150ft)에 위치하고 있는 테나야호수는 흰 눈이 그대로 쌓여 있는 봉우리와 쭉쭉 뻗어 오른 침엽수를 병풍처럼 거느리고 있다. 맑게 빛나는 거울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짙은 에메랄드 물빛 탓에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같기도 하다. 큰 바위, 큰 산, 큰 강처럼 큰 호수를 바라보는 것도 영혼을 숙연하게 하는 바가 있다. 거기 유유히 흐르는 카약을 보노라니 여기야말로 천국이라는 생각이 든다.


▲ 초원을 가로지르는 트레일. 지름길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지나는 길에는 멀리 요세미티계곡의 속살과 하프돔의 뒷모습을 볼 수 있는 전망대인 옴스테드전망대(Olmsted Point)를 지난다. 옴스테드는 현대도시공원의 창시자이며 조경기술자이기도 한데 요세미티의 자연환경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그를 기리고자 전망대 이름을 지은 것이다.

존 뮤어 트레일 종주 퍼밋(permit)은 트레일 입장일로부터 6개월 전부터 신청을 받고 있다. 퍼밋 신청은 팩스나 우편으로 가능한데 보통은 신청서를 다운로드받아 작성한 후 팩스로 신청한다. 퍼밋을 받으면 퍼밋 ID를 발급해 주는데 이는 퍼밋 그 자체는 아니다. 트레일 입구(Trail Head)에 있는 윌더너스 센터(Wilderness Center)를 방문해서 정식 퍼밋을 받아야 한다. 예약되어 있다면 퍼밋 ID와 몇 가지 신상정보만 확인한 후 바로 퍼밋을 발급해 준다.


▲ 요세미티 계곡의 속살과 하프돔을 볼 수 있는 옴스테드 전망대(Olmsted Point).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예약된 퍼밋이라고 해도 오전 10시까지 윌더너스 센터를 방문하지 않으면 다음 선착순 퍼밋으로 넘어간다는 점이다. 물론 사정이 있어 10시까지 방문이 어렵다면 전화로 도착 시간을 연기할 수 있다. 윌더너스의 레인저들은 매우 친절했으며, 백패커로서의 어떤 유대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안전을 당부하며 트레일의 난이도, 소요시간, 적설 여부 등을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특히 존 뮤어 트레일 종주자들에게는 “굿 럭(Good luck)!”을 잊지 않았다.

윌더너스 센터에서는 곰통(Bear Canister)을 대여해 준다. 사전에 곰통을 준비하지 않았다면 이곳에서 곰통을 빌려야 하는데 신용카드나 현금으로 결제할 수 있다. 빌린 곰통은 종주를 마친 곳의 윌더너스 센터에 반납하면 된다. 대여료는 7일에 5달러이며, 보증금은 95달러다.


▲ 단 하나의 길로 이어진 358km의 존 뮤어 트레일.

천상으로 이어진 단 하나의 길에서의 송어낚시

윌더너스 센터에서 퍼밋을 받은 뒤 곰통을 대여하고 나니 어느덧 오후가 되었다. 어차피 점심을 해결해야 했으므로 간단하게 라면을 끓여먹고 출발하기로 한다. 오후 1시40분, 마침내 길을 나섰다. 첫날이니 만큼 배낭이 무겁다. 식량을 보급받을 8월 20일까지 약 8일치의 식량을 포함한 배낭 무게는 22kg 정도였다.

투올러미에서 존 뮤어 트레일로 들어서는 입구에 서니 만감이 교차한다. 2년여를 준비해 온 존 뮤어 트레일 종주길에 마침내 들어섰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감격스러웠고, 또 한편으로는 아직 실감나지 않았던 것이다. 초원 위로 가늘지만 길게 뻗은 트레일을 한 발 한 발 내디디며 나는 존 뮤어 트레일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존 뮤어 트레일 종주자(thru-hiker)들이 지켜야 할 수칙 중에는 지름길(short cut)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사람의 발길이 닿는 그 순간부터 자연은 상처를 입기 시작한다. 그 생채기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가늘지만 길게 이어진 단 하나의 트레일만을 허락하고 있는 것이다.

 

갈 길이 아무리 길고 길어도 아무도 숏컷을 만들지 않는 이유
투올러미 메도 ~ 에블린 레이크 갈림길목 10.6km

기품 있는 침엽수(소나무)를 배경으로 드넓은 초원이 펼쳐지고 거기 맑은 개울이 햇빛에 반짝이며 흐른다. 라이엘 캐년(Lyell Canyon) 사이로 흐르는 이 개울은 투올러미강으로 흘러들어가 투올러미의 초원을 적시는 젖줄이 된다. 맑은 개울에는 덩달아 평화롭게 송어들이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이런 풍경은 사실 달력이나 관광 엽서 등에서 쉽게 볼 수 있으므로 다소 식상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런 풍경이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천상이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다.

개울과 호수 어디를 가든 송어는 흔하다. 특히 해질녘이면 수면 위로 뛰어올라 모기나 날벌레를 낚아채는 송어들의 묘기를 보면 놀랍기 그지없다. 그러나 송어가 많다고 잘 잡히는 것은 아니다. 요세미티에서 낚시를 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퍼밋을 받아야 한다. 보통 플라잉 낚시를 하는데, 숙련자가 아니면 쉽게 송어를 잡을 수 없다.


▲ 1 퍼밋을 받기 위해 윌더너스 센터 앞에 줄서 있는 백패커들. 2 곰으로부터 식량을 보호하는 전통적인 방법이지만 권장하지 않는다. 3 투올러미에서 존 뮤어 트레일로 들어서는 입구. 모든 이정표는 이렇듯 소박하다.

송어를 잡아서 부족한 단백질을 보충하겠다는 식량 계획은 무모한 것이므로 권하지 않는다. 일정보다 빨리 도착해서 느긋하게 즐기는 마음이라면 낚시를 하는 것도 좋다. 실제 낚시를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은 아예 호숫가에서 며칠씩 야영을 하면서 송어낚시를 하는데 그들은 장비부터가 달랐다.

3시간 남짓 걸었을까. 오후 5시경 첫날의 일정은 워밍업 정도로 마쳤다. 첫날의 운행거리는 총 10.6km. 개울에서 30m 정도 떨어진 곳에 텐트 4~5동을 설치할 수 있는 제법 널찍한 캠프그라운드가 눈에 띄었고, 첫날은 여기에서 야영을 하기로 한다. 존 뮤어 트레일에서의 첫날밤은 이렇게 놀라움과 설렘이 교차하면서 저물어갔다.


첫날 밤, 곰에게 행동식과 비상식량을 빼앗기다

10여 년 전부터 모든 음식물은 곰통에 넣어 보관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곰통을 가져가는 것은 아예 의무조항인 것이다. 이는 곰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곰의 야생성을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는 취지이기도 하다.

첫날, 우리는 곰통에 넣고 남은 행동식과 비상식량을 주머니에 담아 나뭇가지에 매달았다. 이는 곰이 출몰하는 지역에서 오래 전부터 이용하던 방법이지만 곰통이 나온 이후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국립공원에서 요구하는 사항을 위반한 것이다. 결국 첫날 행동식과 비상식량을 곰이 모두 먹어치우는 비상사태를 맞게 된다.

이튿날 아직 해가 뜨기 전인 5시 30분쯤 기상해서 존 뮤어 트레일에서의 첫 번째 아침을 맞게 되었다. 눈을 비비고 쉘터 밖으로 나와 식사 준비를 위해 곰통을 놔둔 나무 밑으로 가보았다. 가지런히 쌓아둔 곰통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 곰이 다녀간 게 분명했지만 곰통을 열지는 못했다.


▲ 송어 낚시꾼. 그들은 호수 옆에서 며칠씩 야영하면서 낚시를 즐긴다.

순간 나뭇가지에 걸어둔 행동식이 머리에 스쳐 지났다. 역시나, 곰이 다녀갔다. 행동식 주머니를 매단 나뭇가지가 부러져 있고, 주변에는 초콜릿, 파워젤, 마른 과일, 견과류 봉지 등이 찢어진 주머니와 함께 처참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눈앞에 캄캄해졌다. 곰통에 모든 음식을 넣어야 한다는 수칙을 잘 알고 있었지만 첫날이라 식량이 많았고, 4m 이상 되는 높이에 매단 음식물을 이렇게까지 깨끗하게 먹어치울 줄이야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행동식과 비상식량이 없이 나머지 일정을 운행하는 것도 걱정스러웠지만 정말 곰이 야영장까지 내려와 음식물을 먹어치운다는 사실이 순간 두려웠다. 내가 정말 요세미티의 야생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 것이다. 요세미티(Yosemite)라는 말 자체가 인디언 말로 ‘곰’을 뜻하고 있음을 새삼 느꼈다. 첫날부터 당한 예상 밖의 봉변으로 남은 종주 일정이 우려되었고, 심리적으로도 위축되었다.<계속>

존 뮤어 트레일을 빛내는 숨은 일꾼_트레일 크루

존 뮤어 트레일을 걷다 보면 종주자들보다 더 낡은 옷을 입고, 더 많은 땀을 흘리며 트레일을 살피는 사람을 종종 만날 수 있다. 벼랑 위로 아슬아슬하게 나 있는 트레일을 정비하고, 쓰러진 나무를 치우며, 트레일이 훼손되지 않도록 물길을 만드는 이들은 바로 트레일 크루(Trail Crew·트레일 정비공)들이다. 이들은 트레일 종주자들처럼 숲 속에서 야영하며 훼손된 트레일을 정비하는 일을 한다. 이들이 있기 때문에 존 뮤어 트레일이 더욱 빛날 수 있는 것이다.


▲ 트레일을 정비 중인 트레일 크루 브렌단 테일러.
인터뷰에 응한 PCT 소속의 트레일 크루 테일러(Brendan Taylor)는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묻기에 미안할 정도로 땀을 흘리며 오르막의 훼손된 트레일을 정비하고 있었다. 비록 그는 낡은 옷에 땀으로 얼룩진 얼굴이었지만 존 뮤어 트레일을 정비한다는 자부심으로 누구보다도 행복한 표정이었다. 트레일을 걷는 동안 여러 명의 트레일 크루들과 마주쳤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트레일을 정비하는 일에 행복해했으며, 존 뮤어 트레일의 아름다움에 대해 마음껏 누리라고 당부했다. 나는 종주를 마치는 날까지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