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빙벽등반

선인봉 '박쥐-표범-청악' - 2025년 3월 22일(토)

빌레이 2025. 3. 23. 10:32

비로소 기다리던 따스한 봄날이 도래했건만 개강 이후의 과로가 누적된 탓인지 내 몸은 물 먹은 솜처럼 무겁기만 하다. 오늘 등반을 제대로 할 수 있을 지 망설이면서 스스로도 반신반의 하게 되는 복잡한 심경이다. 그래도 약속은 지켜야 하니 그저 악우들 얼굴이나 보자는 생각으로 집을 나선다. 약속 장소인 도봉산 광륜사삼거리에 약속 시간인 08시 직전에 도착한다. 그런데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은경이는 나보다 더 몸이 안 좋아 보인다. 곧이어 기범씨가 오토바이를 타고 바람을 가르며 정시에 도착하니 반가운 마음에 두 약골들은 잠시나마 생기를 되찾은 듯한 표정으로 그를 맞이한다. 기범씨와는 올해 들어 처음으로 줄을 묶는 날인 만큼 몸이 좋지 않더라도 정신력으로 이겨내고 활력을 되찾아 보자는 다짐을 하면서 어프로치에 나선다.

    

푸른샘과 석굴암을 거쳐 선인봉 표범길 아래의 베이스캠프에 이르는 과정이 평소보다 힘겨운 건 어찌할 수가 없다. 마치 습설에 가지가 꺽여 무너져내린 등로 주변의 소나무들처럼 다리 근육에 힘이 잘 실리지 않는 느낌이 마음까지 위축시킨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선인봉 암벽 밑단의 아지트에 도착한 후로는 내가 이 곳에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기분이 점점 좋아진다. 오늘같이 등반하기 좋은 주말 시간에 선인봉 바윗길이 이렇게 한적한 적이 있을까? 그 많던 클라이머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선인봉 표범길 주변에서 우리팀이 아닌 다른 클라이머들은 하루종일 그림자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선인봉 암장을 우리 셋이서 통째로 전세낸 격이 된 것이다. 이렇게 운수 좋은 날에 내 몸상태가 별로란 게 아쉬울 따름이다.

 

먼저 선인봉을 수호신처럼 지키고 있는 소나무까지 이어지는 '박쥐길' 3피치를 70미터 로프 두 동으로 셋이서 단 피치로 올랐다. 박쥐길 초입의 구석진 응달엔 아직까지 잔설이 남아 있었다. 다음으로 '표범길'은 4피치 테라스까지 기범씨와 나 둘이서만 등반했다. 은경이는 감기몸살이 심하여 양지바른 베이스캠프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청악길' 한 피치를 모두가 한 차례씩 톱로핑 방식으로 등반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박쥐'와 '표범'은 전혀 새로운 바윗길처럼 낯설고 힘들었으나, 피치가 거듭될수록 서서히 등반 감각이 살아나는 듯한 충만감이 차올랐다. 때마침 2025시즌 프로야구 개막전이 열린 날에 딱 맞추어 우리도 기분 좋게 올해 암벽등반의 서막을 기분 좋게 열어제친 셈이 되었다. 앞으로 다가올 희망찬 등반시즌을 즐겁게 맞이할 기대감에 한껏 부풀 수 있었음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