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때 사스페에 도착해서 하룻밤이 지났다. 오늘은 처음으로 트레킹에 나서는 날이다. 새벽에 잠이 깨어 창문 밖을 열어보니 벌써부터 스키를 둘러메고 숙소를 나서는 한 무리의 스키어들이 보인다. 7시 30분부터 제공되는 조식 시간에 앞서 숙소 근처의 사스페 거리를 잠시 둘러 보았다. 만년설에서 스키를 즐기려는 스키어들과 알파인 등반에 나서는 복장의 클라이머들이 아침 댓바람부터 활기찬 발걸음으로 분주하게 골목길을 오가는 모습이 조금은 낯설어 보였다. 다른 한편으론 알프스의 고봉들에 둘러싸인 깊은 산골마을에서는 여명이 밝아올 무렵부터 부지런히 하루를 시작할 수 밖에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누구보다 부지런한 농부였던 부모님께서 늘 그랬던 것처럼. 인간들이 약속한 출퇴근 시간이 지정되어 있는 도시와 달리 이러한 산골에서는 대자연의 순리를 따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장시간의 비행과 시차로 인한 여독이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해발고도 2870 미터인 랑플루(Längfluh)까지 오르는 길은 그리 쉽지 않았다. 중간 케이블카역이 있는 스피엘보덴(Spielboden, 2448m) 산장까지는 거의 임도처럼 넓은 길을 따라 올랐다. 겨울이면 스키 슬로프였을 그 비탈길이 제법 가팔랐으나 스피엘보덴 산장까지는 그런대로 오를만 했다. 그 이후가 문제였다. 평소에 산행을 거의 하지 않는 아내가 가벼운 고소 증세를 보이는 듯했다. 막바지 빙하 옆으로 오르는 구간에서는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한 발, 두 발 내딛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버거워 보였다. 그래도 맨 뒤에서 내가 함께 하면서 천천히 오르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하여 여유로운 점심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설산 아래의 알파인 호수와 빙하를 둘러보는 점심 이후의 시간은 고생 끝에 맞이한 행복 가득한 순간들이었다. 하산길에 대한 부담감 전혀 없이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오는 길까지 즐거움 가득이었다. 시차 적응에도 성공하여 아내와 함께 첫 트레킹을 무사히 잘 마쳤다는 안도감이 무엇보다 큰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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