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하얀 찔레꽃 만발한 둘레길을 걸으며

빌레이 2017. 5. 25. 07:04

모처럼 쾌청한 하늘이다. 미세먼지 지수가 언제부터 일기예보 항목에 끼어들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예전엔 공기 탁한 건 신경도 쓰지 않고 살았던 것 같다. 요즘 우리나라의 일기예보는 국민들의 야외활동까지 간섭한다. 비가 오거나 미세먼지 농도가 높으니 나들이를 자제하라고 당부한다. 참 웃기는 일이다. 날씨에 관한 정보를 전달해주는 것까지는 고마운데 사람들의 일상 생활까지 제어하려고 하는 자세는 좀 지나친 면이 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나도 외출할 때는 일기예보의 눈치를 보게 마련이다. 주말의 등반 계획을 짤 때도 날씨는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다.


간밤에 내린 비 탓인지 평소에 흐릿하게 보이던 불암산 슬랩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퇴근 후 손가락 재활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갈 생각을 바꾸어 둘레길을 걸어서 암장에 가기로 한다. 지난 주말에 수락산을 거닐면서 맡았던 아카시아꽃 향기가 그리웠기 때문이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주변의 둘레길에는 아카시아 나무가 유난히 많아서 해마다 이맘 때면 그윽한 향기에 취하곤 했었다. 하지만 둘레길 초입에 들어서자 마자 아카시아꽃은 이미 사라져버렸음이 감지된다. 둘레길 위에 흙먼지 섞인 하얀 아카시아꽃의 잔해가 쌓여있다. 기대가 실망으로 변하는 순간도 잠시 길가에 소담스레 피어 있는 찔레꽃 무리가 나를 반긴다. 자연스레 장사익이 불렀던 노래 <찔레꽃>을 흥얼거리게 된다. 

 

하얀 꽃 찔레꽃 / 순박한 꽃 찔레꽃 / 별처럼 슬픈 찔레꽃 /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 그래서 울었지 목놓아 울었지 /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 그래서 울었지 밤새워 울었지 / 하얀 꽃 찔레꽃 / 순박한 꽃 찔레꽃 / 별처럼 슬픈 찔레꽃 /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 찔레꽃처럼 울었지 / 찔레꽃처럼 노래했지 / 찔레꽃처럼 춤췄지 / 찔레꽃처럼 사랑했지 / 찔레꽃처럼 살았지 / 찔레꽃처럼 울었지 / 당신은 찔레꽃 / 찔레꽃처럼 울었지


장사익의 <찔레꽃>을 듣고나면 항상 눈물을 글썽이게 된다. 아마도 타고난 노래꾼 장사익이 한이 서린 목소리로 목청껏 부른 후반부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노래의 앞 부분이 더 좋다. 노랫말이 가녀리고 소박한 찔레꽃의 인상을 정말 잘 담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찔레꽃은 식물 분류상 장미과이고, 꽃말은 고독, 신중한 사랑,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한다. 아파트 단지의 하얀 울타리를 장식하고 있는 빨간 장미꽃이 예쁘게 보이는 요즘이지만, 내게는 산길에 피어있는 찔레꽃이 더 아름답게 다가온다. 나의 삶이 화려한 장미꽃보다는 어찌 보면 보잘 것 없는 찔레꽃 쪽에 더 가깝다는 생각에서 오는 동질감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가 북한산 둘레길과 인접해 있어서 나는 좋다. 부동산 시세에 민감한 사람들은 이 곳에 눌러 앉은 걸 이상하게 생각하지만 시류에 편승하여 살고 싶은 마음은 애초부터 나에게 없었다. 집에서 나오면 걸어서 5분 거리에 둘레길이 있다. 둘레길에 들어서 왼쪽으로 가면 직장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가면 암장으로 이어진다. 두 곳 모두 걸어서 한 시간 남짓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이다. 찔레꽃이 심심찮게 반겨주는 둘레길을 걸으며 암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공기 좋고 한적한 오솔길을 걷는 이 순간의 기쁨을 몇 억원 올랐다는 아파트 가격과 맞바꾸고 싶지는 않다. 이렇게 생각하니 내가 정말 값비싼 산책을 하고 있다는 착각에 헛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럭셔리 산책을 한 때문인지 암장에서도 새로운 루트를 예상보다 쉽게 완등하는 기쁨을 누린다. 이래 저래 찔레꽃처럼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마음만은 부자라는 행복감을 감출 수 없는 졸부가 된 기분이다.     


장사익 - 찔레꽃 - EBS 스페이스 공감 263회 영상

https://youtu.be/dz_VM5UZVIM?list=RDdz_VM5UZV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