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7시부터 도봉산 광륜사 삼거리에서 악우들을 만나 어프로치를 시작한다. 만월암을 거쳐 '배추흰나비의 추억' 루트 출발점 아래의 공터에 도착한 시간은 8시 반 무렵이다. 우리들 외에는 아무도 없는 고요한 숲 속에서 산새 소리 들으며 느긋하게 장비를 착용한다. 오늘은 우리팀이 '배추흰나비의 추억' 루트를 독차지 한 듯하여 3피치부터 등반하려던 당초의 계획을 바꾸어 첫 피치부터 차근차근 올라보기로 한다. 내가 선등하고 은경, 성배 순으로 오른다. 비교적 쉬운 1, 2피치를 재빨리 끝내고 3피치로 옮겨간다. 내심 3피치 후반부의 크럭스인 직상 세로 크랙을 자유등반 방식으로 돌파하고 싶었으나, 선등의 압박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인공등반 방식으로 오른 것이 못내 아쉽다.
'배추흰나비의 추억' 루트 하일라이트 구간이라 할 수 있는 4피치도 후반부의 크럭스를 돌파하는 데 예상보다 많은 힘을 쏟는다. 비교적 쉬운 5피치를 올라서서 행동식과 음료를 섭취하면서 눈앞의 6피치는 만족스런 자세로 올라보리라 마음을 다잡아보지만 첫 볼트를 넘어서는 것부터 힘겨워 한다. 크랙 구간 다음에 나타나는 45 미터에 이르는 긴 슬랩 구간이 다소 부담스럽게 다가왔던 모양이다. 그래도 7피치까지 모든 구간을 안전하게 등반하고 악우들과 함께 연기봉 정상에서 맞이한 충만감은 예상보다 크다. 두 번의 하강으로 '요세미티 가는 길' 5피치 출발점 앞의 테라스로 내려와 늦은 점심을 먹은 후, 다른 악우들도 더이상 등반의욕이 발동하지 않은 듯하여 하산을 결정한다. 언젠가는 '요세미티 가는 길' 루트도 즐겁게 오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마음 속으로 기약한다.
원정등반을 위한 체력이 내 생각만큼 쉽게 올라오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몸이 노쇠해진 까닭일까? 4년 전 봄의 리볼팅 작업에 참가했고, 3년 전 여름날에 아주 상쾌하고 만족스런 등반을 감행했던 뜻깊은 경험들을 간직하고 있는 '배추흰나비의 추억' 루트이기에 등반을 준비하면서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었다. 등반성 높은 피치만을 골라먹자는 생각으로 '배추흰나비의 추억'을 3피치부터 올라 정상을 찍은 후, '요세미티 가는 길' 루트를 몇 피치만이라도 붙어보자는 것이 애초의 계획이었다. 6월 말에 떠날 요세미티 원정 등반을 염두에 두고 있기에 당연히 아직까지 맛보지 못한 '요세미티 가는 길' 루트에 관한 정보를 더 많이 찾아보았다.
내 체력을 감안하지 않은 출발 전의 의욕적인 등반계획은 절반의 성공에 만족해야 했다. '배추흰나비의 추억' 전 루트 등반을 완료하고 나니 더이상 새로운 루트에 붙을 염사나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3일 전의 4만보 가까운 우중산행 후의 피로감도 여전히 남아 있는 듯했다. 악우의 말을 빌리자면 지난 번 등반 때보다 내 몸이 적어도 3년은 더 늙었다는 걸 간과한 탓이다. 서럽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 이제부터는 내 몸상태의 현주소를 냉정하게 파악하여 체력을 끌어올릴 때의 준비 기간이나 피로로부터 회복하는 시간을 좀 더 넉넉히 잡는 것이 지혜로운 행동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