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환타지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고리타분한 성격 탓인지는 몰라도 지나친 환상이 개입된 이야기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공감이 가지 않는다. 헤밍웨이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도 대부분의 작품이 리얼리티 문학의 정수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최근에 아주 재미 있게 본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현 시대의 작가인 주인공이 밤마다 시간여행을 하면서 파리의 카페에서 헤밍웨이를 만나는 장면이 떠오른다. 내가 헤밍웨이를 직접 만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몰입감이 높았었다. 오히려 이런 방식의 환상이라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캐나다의 소설가 얀 마텔이 지은 <파이 이야기>는 원작의 제목을 그대로 한 <라이프 오프 파이>란 영화를 우연히 IPTV에서 본 이후로 원작 소설이 읽고 싶어서 구매해 두었던 책이다. 소설은 2002년도에 부커상을 수상하고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랐으며, 2012년에 개봉된 이안 감독의 영화 역시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으며 흥행에도 성공했다고 한다. 영화는 충분히 재미 있고 잘 만들어졌다는 인상을 받았다. 언뜻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가 연상되기도 하는 소설에서는 매우 유익한 내용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호랑이와 소년이 구명보트에서 227일 동안이나 태평양 한가운데를 표류하면서 살아남는다는 비현실적인 줄거리는 작가의 필력 때문에 충분히 설득력 있는 이야기가 된다.
종교학과 생물학 전공자로 나오는 주인공 파이가 전해주는 이야기들이 충분히 매력적이다. 평소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던 힌두교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동물원과 해양 생물의 생태에 대한 묘사는 알지 못했던 영역에 대한 지평을 어느 정도 넓혀 주었다. 하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난 후에는 나에게 뭔지 모를 공허함이 남았다.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헤밍웨이 등의 작품들과 같은 고전 문학을 읽고 난 후에 남는 만족감이나 뿌듯함 같은 것은 없었다. 현재의 문학 작품을 보면서 고전을 탐독하던 시절의 감흥을 그리워하는 것도 나이듦의 한 현상은 아닐지 생각하니 조금은 쓸쓸하기도 하다. 내 안에 새로움을 거부하는 완고함은 없는지 반성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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