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트레킹

팔공산 산장에서 대구 산악인들과 밤을 보내다 - 2013년 4월 19일~20일

빌레이 2013. 4. 21. 21:06

프랑스 샤모니에서 활동하는 알프스 등반가 허긍열 선생이 귀국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만날 약속을 잡았다. 지난 가을에 팔공산 산장에서 보냈던 기억이 좋아서 다시 한 번 신세를 지기로 한 것이다. 최근 허 선생님의 허리가 안 좋다는 소식을 접하고 내심 걱정이 되었으나 약속을 취소할 정도는 아니어서 다행이다. 동대구역에서 반갑게 만난 우리는 먼저 대구 시내의 봄을 만끽했다. 시인 이상화 고택과 계산성당, 가곡 동무생각에 나오는 청라언덕 등은 꼭 한 번 보고 싶던 곳이었는데 마음 통하는 허 선생님의 안내를 받으며 돌아보니 더욱 각별히 다가왔다.

 

늦은 오후엔 허 선생님의 사모님이 합류하여 팔공산 자락의 둘레길을 산책한 후 저녁식사를 하고 산장으로 향했다. 기차를 타고 내려오면서 창밖으로 본 산하는 남쪽으로 갈수록 초록빛을 더해가고 있었다. 대전을 지나 대구에 이르는 구간의 산은 벌써 연초록 빛깔을 띠고 있었으며, 대구 시내의 느티나무는 무성한 잎으로 단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헤드렌턴을 착용하고 오르는 팔공산의 밤은 봄 답지 않게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허 선생님 부부와 함께 도착한 산장엔 이미 두 분이 자리를 잡고 있다. 다행히 허 선생님과 잘 아는 대구의 산악인들이다. 두 분은 산악 잡지에서 접한 기억이 있는 까닭에 얼굴이나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휘발유 남포불이 실내를 비춘 가운데 다섯 명이 둘러 앉아 도란도란 얘기 나누는 기분이 더 이상 좋을 수가 없다. 지난 가을 허 선생님이 알프스에서 따온 마가목 열매로 담근 술이 이제는 알맞게 익어 제 맛을 내는 듯하다. 술과 음식이 흥을 돋우니 우리들의 대화는 더욱 정답게 무르익어간다. 생활 속의 자잘한 일상에서부터 암벽등반과 해외 등반 얘기까지, 때로는 역사와 문학적인 주제부터 수학과 과학 관련 얘기까지 경계를 두지 않고 산꾼들의 수다는 끊이지 않는다. 그 안온한 분위기는 산 아래에서는 좀처럼 얻기 힘든 것이다. 산 속의 밤이 주는 고요함 속에 속삭이듯 이어지는 꿈 같은 대화의 장은 순수함이 없다면 존재하기 힘든 정말로 값진 순간이다.

 

새벽에 잠이 깨어 밖에 나와보니 산장 밖에서 홀로 비박한 허 선생님의 후배 분이 인사하며 얼굴 위로 비가 떨어지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그 비는 잠시 후 눈으로 변하고, 눈발은 이내 함박눈처럼 날린다. 두어 시간 사이에 눈은 한겨울처럼 산장 주변을 하얗게 덮어버린다. 허 선생님의 두 지인 분들은 먼저 하산하시고, 허 선생님 부부는 눈이 계속 내리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침낭 속에서 달콤한 잠에 취해 계신다. 나는 잠시 산장 주위를 산책하며 사진기에 보기 드문 풍경을 담는다. 거미줄에 눈이 내려앉은 모습, 진달래와 양지꽃 위로 눈이 쌓이는 모습들은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백 년도 넘는 시간 동안 그 자리를 지켰을 소나무들에겐 때 늦은 춘설 쯤이야 하며 무심할 수도 있겠지 싶다. 다시 침낭 속에 들어가 아랫목 같은 온기를 느끼며 스마트폰의 메모장에 산장 주위 풍경을 보고 느낀 점을 글로 남겨본다.

 

늦은 아침 식사를 하는데 자그마한 멧새 한 마리가 산장 안으로 들어와 주위를 맴돌며 음식물 찌꺼기를 찾아다닌다. 가까이 다가가도 도망가지 않는다. 그 전에 들어온 새 한 마리는 창문에 부딪치며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는데 손으로 잡을 수 있었다. 내 손 안에 잡고서 사진이나 찍을려는 순간 깃털을 뽑힌채 달아나버린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아무튼 즐거운 추억이다. 커피 한 잔을 마시고 하산을 하면서 보니 눈이 제법 소복히 쌓였다. 춘설이라 얼지 않아 산행하는 데에는 별 지장이 없다. 동화사 쪽으로 하산을 마칠 때까지 세 사람이 편안히 얘기 나누며 느릿느릿 내려온다. 사월 하순에 팔공산에서 맞이한 함박눈 만큼이나 풍성한 마음을 안고 팔공산을 뒤로하는 기분이 좋다.

 

1. 사월 하순에 대구의 팔공산에서 보는 함박눈. 산 아래엔 비가 내렸다.

 

2. 금요일 오후엔 전형적인 봄날이었다. 둘레길 주변의 복사꽃이 만개했다.

 

3. 올해 들어 처음으로 본 각시붓꽃이 반갑다.

 

4. 산에 핀 개복숭아꽃이 예쁘다.

 

5. 연달래는 활짝 피고, 진달래는 이제 새 이파리를 피운다.

 

6. 서쪽으로 지는 해가 선명하지 않은 것이 다음 날 비가 올 날씨를 예견하는 듯하다.

 

7. 새벽에 눈이 오기 전 산장 주변을 산책한다. 진달래가 듬성듬성 피었다.

 

8. 돌집 산장이 오래도록 자리를 지켜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팔공산이 국립공원이 된 후에도 말이다.

 

9. 눈이 내리기 시작하니 거미줄이 선명해진다.

 

10. 가녀린 양지꽃에도 눈이 쌓인다.

 

11. 피어나는 진달래에 눈이 내려앉으면 꽃이 만개하지 못할 것이다.

 

12. 산장 주변엔 우람하고 멋진 소나무들이 많다.

 

13. 눈발은 점점 심해져서 금방 주변을 하얗게 덮는다.

 

14. 다운 침낭 안은 아랫목 같은 온기를 제공하니 좋다.

 

15. 산장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멧새 한 마리.

 

16. 하산 중에 들른 염불암에도 한겨울처럼 눈이 쌓였다.

 

17. 염불암 담장에 쌓인 눈이 적설량을 말해준다.

  

18. 이번에도 허 선생님 부부는 나에게 세심한 배려로 따뜻함을 베풀어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