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 B길 등반 - 2010년 9월 9일
새벽에 일어나니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인수봉 등반이 취소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북한산 둘레길을 따라 우이동까지 걸었습니다. 자일과 암벽 장비를 담은 배낭이 무거워 예정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간간히 내리는 비 맞으며 걷는 도중, 비가 와도 약속 장소에서 만나 암장으로 이동한다는 최 강사님의 메시지가 왔습니다.
날씨는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상황에 맞게 몸을 맡기고 즐기면 된다는 평소 생각이 최 강사님과 다르지 않으니 기분 좋았습니다.
도선사 주차장에서 모두 정시에 모여 출발합니다. 비는 어느새 그쳐 있었습니다.
최 강사님, 양 강사님, 인천, 정신, 은경, 주성, 이렇게 여섯 명이 함께 했습니다.
하루재 지나 인수 B코스 초입에 이를 때까지 비는 내리지 않아 등반 준비를 하고 슬랩에 오릅니다.
첫 번째 마디의 선등을 맡았습니다. 최 강사님의 안정적인 빌레이 덕에 편안히 오를 수 있었습니다.
비가 많이 온 후라 바위면의 상태를 걱정했는데 예상보다 미끌리지 않았습니다.
첫 볼트 전에 프렌드 하나를 설치하니 심적인 안정감이 들었습니다.
확보 지점에 자일을 고정하고, 최 강사님, 정신이, 은경이, 인천이가 차례로 오릅니다. 슈퍼베이직을 이용한 연등입니다.
양 강사님께서 후등을 하시고 인천이가 간접 빌레이를 보았습니다.
두 번째 마디는 정신이가 선등을 섰습니다.
최 강사님께서 선등자 빌레이를 보시면서 코치를 해주시니 잘 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정신이가 확보 지점에 자일을 고정하자 최 강사님, 은경, 주성, 인천, 양 강사님 순서로 연등했습니다.
소나무가 자리하고 있는 둘째 마디 확보지점에서 보기드문 구름바다를 보았습니다.
설악이나 지리산에서 볼 수 있는 운해를 인수봉 바윗길에서 내려보는 맛이 특별했습니다.
셋째 마디와 넷째 마디는 크랙과 침니가 주를 이루는 구간입니다.
가벼운 몸놀림으로 레이백 자세가 일품인 은경이가 선등을 맡았습니다.
특히, 넷째 마디의 크랙과 침니 구간을 오르는 은경이의 모습은 아주 멋졌습니다.
발 째밍과 핸드 다운을 번갈아 써야하는 침니 구간이 저에게는 꽤나 힘들었습니다.
트레버스와 슬랩 등반 코스인 다섯째 마디의 선등은 정신이가 맡았습니다.
트레버스 구간에서 프렌드 두 개를 설치하니 아주 안정적인 등반이 가능했습니다.
확보 지점에서 숲길을 조금 오르니 여섯 번째 마디 출발 지점이 나타났습니다.
슬랩을 사선으로 오르는 여섯째 마디의 선등은 양 강사님께서 맡아 주셨습니다.
비가 본격적으로 뿌리기 시작하여 선등자의 모습까지 흐릿하게 보이는 악조건 속에서도 안정적으로 오르셨습니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을 때, 퀵도르를 거는 소리에 의지해 선등자 빌레이를 보는 최 강사님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최 강사님, 인천, 정신, 은경 순으로 연등하고, 저는 정신이의 빌레이에 의지해 후등으로 퀵도르 회수하며 올랐습니다.
여섯 번째 마디의 확보 지점에서 숲길을 따라 조금 오르면 마지막 구간인 참기름 바위가 나타납니다.
저는 보지 못했지만 참기름 바위의 선등은 인천이가 섰다고 합니다.
인천이가 깔아 놓은 자일을 잡고 쉽게 오르니 정상입니다. 비는 더욱 세차게 내렸습니다.
비를 피할 수 있는 바위 그늘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점심을 나눠 먹는 맛이 짜릿합니다.
악천후 속이라 아무도 오르지 않은 인수봉 정상엔 우리들만 있었습니다.
세찬 비바람 속에서의 하강은 매우 힘들었습니다. 자일이 엉킬 수 있기 때문에 모두 두 줄 하강을 했습니다.
물 먹은 자일은 잘 빠지지 않았고, 폭풍우 속에서 체온을 지키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최 강사님과 양 강사님의 침착한 행동으로 우리 모두는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정신이가 준비해온 무전기가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자일을 회수하는 것이 이렇게 힘들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물 먹은 자일이 바람에 휩쓸리니 끌어내리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주마를 사용하여 세 명이 힘을 합해 끌어 내리니 겨우 자일이 내려왔습니다.
고생스러운 작업이었지만 그 때문에 추위를 이길 수 있었으니 그리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최 강사님의 코치와 안정적인 빌레이 덕택에 다른 모든 이들이 선등을 설 수 있었습니다.
악천후 속에서도 안전하게 즐긴 멋진 등반이었습니다.
등반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이 그렇게 뿌듯할 수 없었습니다. 모두 전문등반가 같았습니다.
선등자 한 명의 능력에 의지하여 등반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만족감이 있었습니다.
한 명이 줄곧 선등으로 오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협동해서 올랐기 때문에 얻은 만족감입니다.
이제 걸음마를 뗀 땅거미들을 잘 인도해주신 최 강사님과 양 강사님께 깊히 감사드립니다.
서로를 배려해주는 사랑이 흘러 넘치는 등반 후의 하산 길에도 비가 내려서 인지
우리의 주제가 <꿈의 대화>가 아닌 안도현의 시 <구월이 오면>의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그대
구월의 강가에서 생각하는지요
강물이 저희끼리만
속삭이며 바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젖은 손이 닿는 곳마다
골고루 숨결을 나누어 주는 것을
그리하여 들꽃들이 피어나
가을이 아름다워지고
우리 사랑도
강물처럼 익어가는 것을
최 강사님, 강사님의 오늘 모습은 꼭 하모니 좋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같았습니다. 멋진 그 모습 저도 닮고 싶습니다.
양 강사님, 든든한 버팀목이 하나 더 있으니 우리 친구들은 악천후 속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편하게 이끌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양 강사님과 앞으로도 좋은 등반 많이 하고 싶습니다.
마음 통하는 친구들과의 조화로운 협동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새삼 느끼게 해준 은경, 정신, 인천 친구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좋지 않은 날씨 속에서도 인수봉 첫 등반을 멋지게 해낸 인천이에게 축하의 말을 전하는 바입니다.
1. 빗속을 뚫고 인수봉 정상에 오른 땅거미들... 모두가 전문 등반가...ㅎㅎ
2. 한 사람의 선등자가 아닌... 모두가 선등자... 그래서 내가 아닌... 우리가 오른 인수봉... 협동의 아름다운 가치..
3. 인수 B코스 출발 직전 전의를 다지는 땅거미들... 이 때만 해도 비가 멎을 줄 알았다..
4. 비가 온 후의 바위면을 조심스럽게 오른 후 확보하고 자일을 고정하니... 비로소 마음의 안정이 찾아오고..
5. 모든 마디의 선등자 빌레이를 보시고 코치해주신 최강사님의 두 번째 마디 등반 모습... 뒷 모습도 멋져부러...ㅎㅎ..
6. 오아시스에서 바라본 운해... 시시각각 변하는 구름 바다... 북한산에선 보기 드문 풍경..
7. 네 번째 마디 침니 구간을 멋지게 선등하는 은경이... 몸 째밍 동작도 일품..
8. 다섯 번째 마디의 트레버스 구간을 오르고 있는 정신이... 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멋진 모습..
9. 본격적으로 쏟아지는 비 속에서 여섯 번째 마디를 선등하시는 양강사님... 멋지고 안정적인 선등..
10. 이번 등반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다름 아닌 하강... 폭풍우 속에서 자일을 회수하는 일도 고역... 좋은 경험..
11. 하루재를 지나면 비로소 인수봉이 손짓한다... 등반의 기대감으로 설레이는 순간..
12. 집에서 북한산 둘레길을 이용해 우이동으로 걸어갔다... 초입의 무궁화가 싱그러웠다..
13. 둘레길 주변엔 사람들 사는 풍경이 있어 포근하다... 간만에 보는 토란 위의 물방울..
14. 둘레길의 편안한 길과 인수봉의 바윗길은 천지 차이지만... 나는 둘 다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