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봉 '동양' - 2025년 6월 18일(수)
캐리(CARI, Climbing of All Routes in Insu-peak) 프로젝트의 오늘 순서는 '동양'이다. 총 8피치의 바윗길인 이 루트를 부분적으로 등반해본 적은 몇 차례 있으나, 정코스로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서 등반한 건 오늘이 처음이다. 캐리 프로젝트를 할 때, 기범씨는 모든 루트를 정코스로 진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오늘같은 평일이 아니면 루트 중간에서 다른 팀들과 엉키는 귀찮은 일이 자주 발생하기 마련이다. 아프리카 코트디브와르 의료봉사를 떠나야 해서 함께하지 못한 구선생님의 빈 자리가 허전했지만, 한적한 인수봉 남면에서 기범씨와 둘이 오롯히 등반에 집중하면서 '동양' 루트를 오르는 시간이 무척이나 소중했다.
등반 중에 가끔 작업용 헬기가 우리 주변을 지나 백운산장 인근을 오가면서 일으키는 큰 소음 탓에 잠시 소통이 어려웠던 사소한 불편함은 있었다. 인수봉 리볼팅 작업 후에도 제거되지 않고 흉물처럼 남아있는 문고리 모양의 녹슨 볼트들이 '동양' 루트의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었으나, 안전 상에도 좋을 것이 없는 그것들이 내 눈에 거슬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개척자분들이 소중한 유물로 여기는 그 마음은 백 번 이해하지만, 인수봉 전체 바윗길을 대대적으로 정비할 때 등반사적으로 중요한 흔적 몇 개만 남겨두는 것으로 유물 보존의 의미는 충분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여전히 지울 수가 없었다.
서너 차례 오른 적이 있는 '동양' 3피치의 크럭스 구간은 여전히 어려웠고, 볼트따기 구간이 있는 6피치까지는 전에도 한두 번 쯤 등반해본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내게는 오늘이 처음인 듯한 7피치는 만만치 않은 슬랩이었고, 마지막 8피치 초반부의 크랙 구간은 손가락이 잘 들어가지 않고 밸런스 잡기도 좋지 않아서 아래에서 보는 것보다 까다로웠다. 6피치 인공등반 구간의 볼트는 구형 문고리 볼트와 나란히 설치된 탓에 간격이 너무 촘촘했고, 정작 7피치 까다로운 슬랩 구간의 볼트 간격은 너무 멀다는 느낌이었다. '동양'을 정코스로 완등한 후, 정상 아래의 넓고 오목한 테라스에서 한가롭게 간식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외국인 한 명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같이 하강할 수 있냐고 물었다. 기범씨가 잠시 망설이고 있으니, 자기는 다운 클라이밍으로 내려갈 수 있다면서 다시 정상으로 올라갔다. 아무래도 위험할 듯하여 우리와 함께 하강하기로 결정하고 큰 소리로 그 녀석을 불러서 다시 오게 했다.
서로 통성명을 나누었는데, 숀 맥클레인(Sean Mcklain)이란 그 친구는 미국 유타주의 솔트레이크에 사는 클라이머라고 했다. 오늘 새벽에 입국했는데 곧장 인수봉으로 와서 '고독'길을 통해 솔로로 정상에 올랐다고 했다. 로프가 없던 차에 우리를 발견하고 레펠을 부탁했던 것이다. 기범씨가 숀의 하강 장비를 점검한 후에 우리 세 사람은 금방 한 팀이 되어 네 번의 하강으로 '여정' 루트 앞의 베이스캠프에 내려섰다. 숀은 기범씨와 인스타 계정으로 소통한 후 우리가 미국에 등반하러 갈 때 서로 연락하자는 약속 아닌 약속을 남기고 떠났다. 점심 후에는 '여정' 1피치 크랙에서 연습했는데, 비록 톱로핑 방식이었지만 올해 처음으로 만족스럽게 완등하고 기범씨와 하이파이브 하는 작은 기쁨을 누렸다. '짬뽕' 루트에서 구조대원들의 평가가 열리는 바람에 갑자기 만원이 된 베이스캠프를 떠나 '꾸러기 합창'에서 한 차례 더 매달렸으나, 힘이 소진되었다는 걸 실감해야만 했다. 기범씨가 테스트 해보라고 한 베알 랜야드 자기확보줄을 처음 사용해보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로 즐겁고 유익한 하루였다.